[묵상] 그가 내 벗이라니!

시편 55:1-23
친구에게 배신 당한 시인의 노래 

(1) 원한과 분노, 폭력과 분쟁뿐인 세상

(2) 나를 비난하고 미워하는 자가 다름아닌
나의 동료, 내 가까운 친구라는 도망가고 싶은 현실

(3) 완전한 안전과 공의가 보장되는 하나님께 의지하여
억압 아래 있는 다른 이들을 격려하는 시인

 

(1) 폭력과 분쟁뿐이다

악담, 분노, 원한이 빗어내는 폭력과 분쟁, 공포과 두려움, 다툼, 고통, 파괴, 억압, 속임수…. 시편 55편은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거의 모든 형태의 폭력적 행태가 다 등장한다. 각종 폭력이 가득한 곳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땅이고, 그래왔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폭력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 한다. 생물학적 유전자 만큼 오래된 것이 분노라는 감정의 전이가 아닐까. 개인, 사회, 국가, 민족 간의 다양한 차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갈등은 마치 매번의 사건과 쟁점을 가지고 새롭게 발생하는 듯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그것은 인간의 역사 속에서 누적되어온 원망과 분노이다. 세계대전 이후 독일의 국가적 반성이라던가, 가족을 살해한 원수를 용서하고 품은 이야기와 같이 유구한 분노의 역사를 종식시킨 시도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일테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매일의 삶이 폭력이 가득한 것은 어찌보면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러지 않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다만, 우리는 나의 억울함에는 예민하지만 내 자신이 어떤 종류의 폭력을 타자에게 전이, 유전시키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다. 분노가 유발하는 폭력성에 너무 익숙해져서 무감각한… 그것이 디폴트 값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익숙하게 화를 내고, 비난한다. 

매일 여러 사람들이 수만가지 일들로 상호작용하는 조직 생활에서는 마치 공적인 일을 하는 사이인척 하지만, 감정이 있는 인간이 어떻게 공과 사를 완벽히 구분하는게 가능하겠는가. 그러다 보니 일을 둘러싸고 각종 원망과 분노, 비난이 엉겨붙고, 일로 힘든 것 보다는 관계 안에서의 감정적인 피로도가 매우 크다. 그 중에서 가장 최악이자 흔히 행해지는 방식은 두려움의 감정을 사용하여 업무적 동기를 부여하는 상사가 아닌가 싶다. 그들은 두려움을 조장하여 원하는 결과를 얻도록 하고, 이 종속적 관계를 지속하도록 한다. 두려움을 통해 일어나지 않은 최악의 상황들을 더욱 크게 보이도록 조장한다. “지금 이것을 완수하지 않으면 너는 결국 저렇게 되리라!!” 사회 전체가 동일한 방식으로 사람들을 선동한다. “노년에 폐지 줍고 싶지 않으면, 사회의 짐이 되고 싶지 않으면, 지금 이것을 쫓아가라!!”

그러다 어느 순간 우리는 지금을 잃어버린 나를 발견하다. 동일한 방식으로 그 두려움을 전이시킬 대상도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을 버리기도 한다. 명확한 가해자를 알 수 없는 살인은 매일 우리의 일상 속에서 그렇게, 조금씩 누적되어 간다. 

(2) 나를 비난 하는 자가 ‘내’ 동료, ‘내’ 친구라니…!

시인은 너무나도 충격이다. 나에게 그런 비난과 폭력을 쏘아 붓는 사람이 다름 아닌 나의 가까운 벗이라는 사실에… 그런데 생각해보면, 그런 폭압자가 나와 가깝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게 또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내 자식, 형제, 부모가 나에게 조금이라도 비난섞인 어조로 말을 하고, 내 친구가 나의 흉을 보는 것은 아주 사소한 일이라도 크고 오래가는 상처가 된다. 처음에는 아주 작은 생채기였던 것이 50년 이상 곪아, 부모님이 돌아가시면서 큰 다툼으로 터져 관계를 끊어버리는 일을 주변에서 너무 흔히 보지 않던가. 

그래서 시인은 날개를 달고 자유롭게 아무도 없는 광야, 쉴 수 있는 안전한 보금자리, 아무도 찾지 않는 은신처로 가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나를 아는 사람이 없는 외국 생활을 한동안 한적이 몇번 있었는데, 그 시간이 늘 휴식같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좋아하는게 아닐까. 한동안 여러 관계, 또 부모님과의 가치 갈등… 이런 것들로 한없이 마음이 복잡해질 때면 늘 몇명의 지기들이 떠오른다. 그들은 일찍부터 가족들과의 관계에 갈등과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그런 갈등과 고통을 뒤늦게 겪게 된 시기보다 훨씬 일찍 이른 나이부터 철이 들어 있었던 그들은 20대 동안 떠날 준비를 하여 머나먼 타지로 떠났다. 당시에는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하며 짠한 마음 반 정도 보태면서도 선뜻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나중에는 그들이 참 현명했구나, 감탄했다. 나도 좀 일찍 같이 준비할껄 하며… 그렇게 나도 분리, 혹은 도망가고 싶어졌다.

(3) 하나님의 권능에 잇대면 다른 이들을 일으키는데까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매순간의 관계와 정보를 통해 끊임없이 양산되고 전이되는 두려움, 폭력에 끄떡없이 살 수 있는 능력자도, 그것을 피할 수 있는 완벽하게 안전한 곳도 이 불완전한 세계에는 없다. 설사 완벽히 혼자만의 공간에 가더라도, 내 안에 심겨진 불안이라는 감정으로 결국 괴로워지기는 매한가지다. 

그래서 시인은 더 이상 불완전한 세상의 논리 안에서 괴로워하기를 멈추고, 완전한 차원으로 나아간다. 아주 먼 옛날부터 보좌에 앉아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개입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19절) 하나님의 완전성에 잇대어 회복되자, 이제 자신처럼 짓눌려 있는 다른 이들도 격려할 수 있는 상태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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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의 짐을 주님께 맡겨라, 주님이 너희를 붙들어 주실 것이니,
주님은, 의로운 사람이 망하지 않도록, 영영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다. 
시편 5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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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바라는 것은, 
내가 타인에게 두려움을 전이하는 폭압자가 되지 않도록 도우시고,
주님의 완전함에 잇대어 균형있게 성장하여,
일상의 관계 속에서 익숙해진 두려움, 폭력적 양태에 억눌려 있는 사람들을 격려하고 도와
그 고리를 끊어내는 역할을 할 수 있길…
안전과 평안이 필요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날개 아래에서 보호받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할 수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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