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거짓의 농도

시편 58:1-11

(1) 정의를 말하며 불의를 품고 행하는 통치자 

(2) 자기중심적 본성으로 행하는 폭력과 거짓 

(3)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질 불의

 

거짓은 폭력보다 가볍다?

시편에는 폭력과 불의가 판을 치는 현실에서 억울함과 폭압자에 대한 두려움을 호소하는 시들이 많은데, 불의(injustice)로 규정되는 죄의 내용에는 거의 매번 ‘거짓(lie)’이 등장한다. 죄, 폭력, 불의라는 단어는 무거운 느낌인데, 거짓이라고 하면 어쩐지 상대적으로 가벼운 느낌이다. 일상적이라고 느끼는 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작기 때문일까? 그래서 되려 거대한 폭력이나 죄로 연결된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거짓의 자기잠식성

성경에 따르면, 에덴 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은 완벽하게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고 한다. 경험한 적이 없어서 신과의 온전한 관계라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지만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을 보면 그 상태가 얼마나 황홀할 것인지 어렴풋이 추측가능하다. 그리고 인간은 일방적으로 하나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망가뜨리는 원죄를 짓게 되는데, 그 죄명은 ‘자기중심성 Self centerness‘ 이라고 성경 전체에서 끊임없이 강조된다. 

이러한 죄의 본질에서부터 생각해보면, 거짓은 자기중심성과 거의 동의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인간됨을 잃어버린 계기가 오로지 자신을 위해 헌신한 자기중심성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자기기만, 자기잠식 cannibalism 행위에 가깝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전제한 관계에서만 완전했던 인간이 스스로 가장 온전할 수 있었던 상태를 망가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인정받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을 충족시키기위해 노력하는 모든 일은 근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가치들을 끊임없이 부정(deny)해야만 가능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단순한 명령이 가장 어려운 일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에서 촉발된 부정의 연쇄작용은 자기자신, 타인, 피조세계 전체로 확장된다. 나의 욕망을 우선으로 추구하려면 어느 시점에서는 타인의 욕망과 충돌하는 경우에 상대방의 것을 부정하고, 공공선을 부정할 수밖에 없다. 성경에서는 이 끊임없는 ‘부정’, 즉, 완전성에서 멀어지는 자기잠식의 모든 행태가 ‘거짓’으로 일축된다. 그리고 마음속에서 촉발된 거짓은 특히 언어적 속성으로 가장 많이 드러난다. 

문제는 농도 : 희석된 거짓

다시 돌아가, 이렇게 근원적 죄, 자기중심성의 직접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거짓을 우리는 왜 그렇게 가볍게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우리가 현실에서 만나는 거짓은 대체로 100%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생각한다. 동시에 바로 그 측면이 거짓의 가장 무서운 성격이라는 생각이 든다.

살인을 하는 것보다는 좀도둑이 되는 것이 쉬워보이는 것처럼, (실제로 형량도 다르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명명백백한 나쁜 행위에도 상대적 무게를 잰다. 만약, 누군가가 나에게 여생의 모든 안전과 안락을 보장할테니, 대신 내 동료를 죽이라고 한다면? 대부분은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말을 조금 바꾸어, 이렇게 요구한다면 어떨까? 혹하지 않나?
“당신의 동료 000은 평소에 업무 수행도 느리고, 사람이 사고에 유연성이 부족해서 회의할 때 늘 이런저런 안건에 토를 다는 것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일을 같이 하는 동료들에게 업무적으로도 피해를 주고 의사결정을 어렵게 해서 우리 팀 운영에 불편을 주는 것 같아 보이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내년에도 같이 일하시는 분들이 업무에 집중하기에 괜찮을지 걱정이 되네요. 그래서 이번 조직 개편에서 동료들의 입장에서 의견을 조금 더 보태어 준다면…”

일상에서 우리에게 요구되는 가치판단에는 어느정도 동의가능한 사실(혹은 동의하고 싶은, 나의 욕망을 건드리는 요소)에 거짓이 버무려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거짓의 농도인 것이다. 농도가 짙지 않아서 나는 그것이 거짓인지 쉽게 판단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그렇게 익숙해지다 보면 중독이 되어 무감각해지기까지 한다. 거짓은 이처럼 시나브로 나를 잠식시키는 마약과도 같다. 

진실의 순도를 바라보며 

이번에 시편들을 묵상하면서 깨닫게 되는 것은 바로 이 거짓의 이러한 엄청난 힘과 두려운 속성이다. 삶의 아주 미세한 영역을 흡사 마이크로미터 수준으로 침투하고 감싸고 있는 거짓들이 언제고 진실을 부인하고 공의로 부터 멀어지도록 만든다. 시편을 읽으면서도 처음에는 마치 내가 그 억울한 시인이고, 매일 폭압자의 핍박을 받는 피해자인것 같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거짓에 동참하는 가치판단에 나는 거의 매순간 놓여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시편의 시인들이 매번 억울함을 호소하고 저주하다가도, 한결같이 마지막에는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며 그 나라를 구하는 것도 그 예배의 가운데에서 자신의 자기중심성, 대놓고 폭력을 저지르는 폭압자와 다르지 않거나, 언제고 그럴 수 있는 자신의 절망적인 운명을 발견한 것이 아닐까. 

너무 많은 거짓이, 치밀하게 침투되어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두렵지만, 그것을 찾아내려 한들… 더 그 거짓에게 잠식당하고 말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거짓을 떼어내기 위해 거짓을 바라보라고 하지 않으신다. 거짓을 벗어나기 위해 가장 온전하고 진실로 가득한 것을 구하라고 하신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전이었던 시편의 맥락이 현재의 우리와 다를지라도, 우리가 근본적으로 그 온전한 삶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성경의 깔때기같은 진리이다. 끊어진 연결고리를 다시 잇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류를 대신해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실현하면서 살 수 있다. 비록 그 정의 조차 이 세계에서는 100% 순도가 아닐지언정, 우리는 우리 수준에서 만들어 나가야 할 정의와 진실이 무엇인지는 알 수 있다. 

오늘 하루도, 에메트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에 가까워 질 수 있길 바랍니다…! 거짓의 농도를 따지기 보다는 진실의 순도에 가까워지길 바랍니다.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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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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