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어쩌다 개가 되었나

시편 59

(1) 무고한 살해 위협을 받는 중에 하나님을 깨우다

(2) 한결같이 지켜주시는 권능의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찬양

 

밤마다 짖어 대는 개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개들은 참 귀여운데, ‘개 같다’ 라는 비유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강도 높은 욕설이었던 것 같다. 상황이 개 같기도 하고, 사람이 개 같기도 한데, 시편 59편의 개는 나를 죽이려는 의도로 밤마다 승냥이처럼 내 집을 감시하는 원수들을 의미하고 있다. 우리의 인생에도 이런 개 같은 사람들이 한두명은 늘 있었다. 신기하게도 학창시절 모든 학교에는 꼭 미친 개가 한 분 정도는 있었고…흠.  

사람을 개로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시편 59편에 등장하는 개들은 시인을 죽이고자 겁박하러 온 원수들이다. 이 개들의 가장 큰 특징은 ‘짖는’ 것이다. 그들은 밤마다 입을 벌리고 동네방네 쏘다니면서 짖어댄다. 이처럼 누군가를 망가뜨리는 중심에는 늘 ‘말’이 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입술에는 칼을 물고서…” 시인은 거짓과 욕설로 가득한 언어 공격에 괴로워한다. “죄가 그들의 입에 있고 그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은 모두 죄로 가득찼습니다… 그들이 저주와 거짓말만 늘어 놓고 있으니…”

누군가를 망가뜨리는 일은 생각보다 간단하다. 사실적인 맥락에 내 의도에 맞도록 약간의 과장과 불안을 타면 훌륭한 폄훼의 무기가 된다. 이 무기의 가장 훌륭한 점은 효율성이다. 처음에 몇번만 찔러주면 큰 노력없이도 알아서 망가지도록 되어있다. 비방하는 말은 사람을 낙담시키고, 그렇게 위축된 마음은 스스로 초라해지며 자멸시키기 때문이다.

말의 위력은 한 집단도 쉽사리 전복시킬 정도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말을 통한 마녀사냥이나 비방이 크고 작은 내분의 단초가 되었던 국정 이야기를 많이 봐왔다. (모략이 성공하면 ‘전략’이 된다.) 오늘날 분 단위로 쏟아지는 뉴스 중에서 정보로 인식할 수 있는 내용은 얼마나 될까? 사실을 사실대로 전달하더라도 음모론과 가짜뉴스로 오염되는 판에, 이제 무엇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정보는 넘쳐나는 반면에, 신뢰도는 어느때보다 더 낮다는 느낌이다. 

예수님의 시대에도 특별히 언어를 통해 사람들을 하나님의 바른 길로 인도해야 하는 가르치는 역할을 맡은 이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말로서 사람들을 오히려 망가뜨리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을 개에 비등한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부르셨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34-35)

위협적인 원수의 실체

개가 중요한 것은 아닌것 같다. 힘은 그들이 짖어대는 폭력적인 말에 있다. 사람은 하나님처럼 한결같지 않다. 그래서 판단하기가 더 어렵다. 나를 정말 아껴주면서도 폭력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정말 한결같다면 ‘원수’라고 여기고 멀어지면 되는데, 어떤 경우에는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 같으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비방하고 욕하며 비난한다. 최근까지도 난 이와 같은 사람의 유동적인 속성 때문에 상황 판단이 늘 어려워 많이 헤매었다.

언어적인 폭력의 가장 교활하고 무서운 활용법은 두려움을 조장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오래되고 아끼는 친구가 있는데, 그녀는 워킹맘이다. 그녀가 일하는 회사는 누구나 알만한 크고 오래된 회사인데, 굉장히 보수적일 뿐더러 최상단에서부터 내려오는 위계 질서의 근간에 언어 폭력과 두려움을 조장하는 방식이 뿌리깊게 학습되어 있다. 친구는 직속 상관과 10년 가까이 함께 일해온 터라, 그 상사가 진급해 가면서 점점 더 그렇게 변해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사람을 위축시키고 잡아 가두는 방식으로 밀고 당기면서, 그런 상황이 좋지 않고 자신이 망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불안하게 해서 도망가지도 못하게 만든다. 

“그 사람도 처음부터 그렇지 않았어.” 

친구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나도 늘 괴로워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사람 그래도 나 배려해서 이런 일도 했었어… 그래도 마음은 여리고 착해.”

그리고 결국 우리는 시인처럼 그런 사람들로부터 도망가는 결심을 하게 되는데, 대체로 이유가 비슷했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아…’

개는 다시 사람이 될 수 있을까 : 개들을 위한 기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구해준 사람들 중에는 귀신들린 자들이 있었다. 나에게는 이 비방하는 말, 폭력성, 거짓이 바로 그 사탄으로 여겨진다. 마치 죄에 물린 좀비처럼 말이다. 그래서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용서하라고 하셨을까.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을 생각하면, 개가 다시 사람이 되는 일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개를 사람으로 만드시려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개죽음을 당하셨던 것 아닌가. 

우선은 시인처럼, 원수들이 나에게 퍼붓는 비방에 잠식당하지 말고, 언제나 나를 용납하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날개 아래로 달려가자. 일단은 망가진 우리 자신의 영혼부터 구제받을 일이다. 아침마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을 노래하며, 정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개를 위해서도 기도하자. 누군가에게 폭력을 가하는 사람을 가만히 보면 그도 이미 누군가에게 폭력을 당한 사람이다. 그 내재된 폭력성이 타인에 대한 파괴적인 양상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니 누군가의 개로 만드려는 사탄의 바이러스 음모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권능을 힘입어 개를 위한 기도를 해본다. 말 자체의 위력이 동일하다면, 태초에 말을 만드신 하나님의 의도가 선하심을 믿기에 우리는 말을 선용할 수 있다. 말로 오염된 사람과 관계를 선한 말로 회복시킬 수 있다.

폭력의 연쇄고리를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몸빵하며 선회시키는 일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 아닌가 싶다. 그러다 보면 피도 꽤 보게 되는데… 내가 죽을 정도까지는 몸빵하지 말고 상태 봐가면서 (다윗처럼 도망도 잘 해야 한다! 낄끼빠빠!) 할 수 있는데까지 해보자… 격투 운동에서 맞는 것도 기술이라고… 인생의 맷집도 계속 하다보면 늘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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