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땅 끝에서 부르짖는 노래

시편 61

(1) 땅 끝에 있는 것 같은 짓눌린 상태에서의 기도 (땅 –> 하늘)

(2) 바위 위에서 맹세와 유업이 생각나다

(3) 주님의 사랑과 진리로 유지되는 연쇄적 다스림 (하늘 –> 땅)

땅 끝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

“세상의 끝에 가본 적이 있나요?”

13년 전 즈음, 나는 땅 끝에 있었다. 한 달 동안 아무도 만나지 않고, 생존을 위해 먹을 것을 구하러 외출하는 정도의 최소한의 사회적 접촉만 하고 있었다. (아사할 마음까지는 없었으므로) 나는 사람이 가득한 도시 한가운데 살고 있었지만, 내 시선은 땅 끝을 향하여 바짝 엎드려져 있었기 때문에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텅 빈 어둠 뿐이고 그 곳에서 나는 혼자 있었다. 

누구에게나 세상의 끝에 있어본 경험이 있다. 그 곳은 내 영혼이 바닥 끝까지 내려가는 최하점이다. 시인은 그 때에 자신의 마음이 무언가에 짓눌려 압도당해서 한없이 약해졌다고 표현했다. (아타프, overwhelmed, WEB) 

땅 끝의 경험은 사람마다 원인도 상황도 제각각 다르지만 동일하게 한없이 ‘내려간다.’
마치 바닥을 기는 것 같고, 기분도 다운(down)되어 저기압이고, 실제로 일어나기 싫고, 급기야 바닥을 치고… 거대한 바위가 내 위에 올라타서 고개 조차 들지 못하게 만든다. 이렇게 납짝 짓눌려 있는 사람들에게 ‘힘을 내, 올라와서 일어서봐!’라는 응원은 때로는 그들을 더 무기력하게 만든다. ⟪아직도 가야할 길⟫에서 스캇 펙 박사는 이런 하강의 기운을 우주적 법칙인 ‘엔트로피’로 표현했다. 내려가는 것이 절대적 힘이기 때문에 올라가는 것은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나 보다 높은 바위 위에서 

시인은 자신을 바위 위로 인도하여 주십사 하나님께 기도한다. 정신 승리하려면 북한산 정도는 올라가거나 하다못해 동네 뒷산이라도 올라가야 할 것 같은데, 시인은 고작 ‘나 보다 높은 바위 위로’ 가게 해달라고 부르짖는다.

바닥에 짓눌려 있는 몸을 일으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의 몸과 마음은 시선의 방향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요가 행법에서도 프라나Prana(호흡)와 함께 중요한 것이 드리시티Drishiti(시선)이고, 대부분의 운동에서도 절대적으로 얼굴과 시선의 방향을 중요시한다. 그렇다면 영혼이 바닥에 눌려있는 사람은? 동일하게 내 영혼의 시선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나 볼 수 있는 정도의 바위이면 된다. 시인은 지금 바닥을 겨누는 내 얼굴을 들어 올려다 볼 수 있을 정도의 내 납작한 영혼의 키 보다 아주 조금 더 높은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고작 그 정도 높이에 올라설 힘이 없어 계속 엎드려져 있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더 안타깝다…

바위를 딪고 서게 되었을 때 시인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일하게 그 자리에 날개를 펴고 자신을 품고 계셨던 하나님을 발견했다. 그제서야 자신이 누구인지 생각난 것 같다. ‘유업’은 ‘서원(맹세)’를 전제로 주어지는 것이고, 맹세는 누군가와 관계가능한 상태, 그래서 상대를 신뢰하고 존중할 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약속의 행위이다. 결국, 시인과 우리가 하나님께 했던 서원은 깨질 수 없는 관계를 하나님과 맺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다시 일어나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한 사람은 그러한 절대적 관계, 약속을 떠올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약속에 따라 주어진 유업이 있었다는 것도 기억이 난다.

디딤판이 되어준 바위

이런 장면에서는 늘 J.R.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생각난다. 세상을 멸망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절대 반지’를 파괴하는 엄청난 과제를 맡은 주인공은 용사도 아니고, 요정도 아닌 전투력 제로의 ‘프로도’라는 약해빠진 호빗이었다. 그는 여정 중에 엄청난 물리적 심리적 좌절에 빠지게 되는데, 여러 도움의 손길이 보태어 지는 과정에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떠올리며 일어나 다시 길을 떠날 수 있게 된다.

내 시선이 바닥의 어둠을 향해 아무것도 보지 못할 때에도 내가 하나님의 임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묵묵히 나를 기다려 주고, 기도하고, 같이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다. 지금까지 굳건히 잘 서 있는 사람일지라도, 역사 속의 수많은 디딤돌 위에 세워진 바위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럴 때에 시인처럼 정체성과 역할을 복기할 수 있다.

주님 앞에 있는 왕

성경에서는 사람에게 주어진 유업이 하나님의 유업이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 나라를 다스리는 청지기로서의 왕이라고 말한다. 프로도가 타고난 용사가 아니었던 것처럼, 우리가 타고난 왕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시편 61편에서 왕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있는 왕위에 있는 왕이라고 표현한다.(7절) 시인 다윗은 실제로 왕이기도 했지만, 가문에서 가장 볼 품 없었던 자신이 하나님의 지명을 받았다는 이유로 왕이 되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어려움과 죄를 짓고 서도 매사코 시선이 하늘로 향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확고한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나도 왕이 될 자격이 없었던, 자녀가 될 수 없었던 존재가 아니던가? 주님 앞에서 왕이 떠난다면 더 이상 통치권을 가질 수 없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바지 사장인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하나님의 영구 방부제 : 사랑과 진리

땅의 끝에서 주님의 앞까지 도달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세상 속에서 엔트로피, 하강의 힘에 지배받으며 살아간다. 주님의 앞, 그 위치에 버티고 있는 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번 시편 묵상 중에서 자주 발견하게 되는 단어가 ‘주의 사랑과 진리(진실함)’이다. 영어로는 ‘loving kindness’와 ‘truth’로 번역되어 있는 것이 많았고, 원어는 ‘헤쎄드’와 ‘에메트’이다.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과 진리로 왕을 지켜주시라는 표현(7절)이 그것으로 애워싸 아기 포대기처럼 보호해달라는 의미로 보이지는 않는다. 엄청난 하강의 힘을 역행하며 근근히 기어오른 정상의 위치를 유지시키는 것은 상승의 힘만큼 강력한 방부제가 필요한 것 같다. 말라 버리더라도 새벽 이슬을 먹고 다시 신선하게 되살아나는 식물처럼, 사람의 상태가 나빠지지 않도록 영구히 주어지는 방부제가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의 한결같은 사랑, 인자 – 헤쎄드요, 늘 옳고 참된 진실, 그래서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 에메트인 하나님일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는 영구 방부제이니, 효과는 확실하다. 아이폰 배터리처럼 3년마다 떨어지지 않는다. (아이폰 유저 아님, 유저들 피셜) 그러니 일단 믿고 쓴다. Made in heaven.

부르짖는 소리가 기도로, 함께 부르는 노래로

땅 끝에서 부르짖은 것은 고통의 ‘소리’였다. 괴성은 바위로 올라서면서 기도로 바뀌고,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이름을 부르는 영원한 노래, 찬양이 된다. (8절) 괴성이라도 좋으니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허공에서 사멸하는 진동이 아니라, 나처럼 고래를 쳐들고 부르짖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와 섞어 화음을 이루는 노래로 만들어 주실 것이다.

누군가의 디딤바위가 되어

누군가의 디딤바위가 되어야겠다. 가능한 디딜만큼 나지막한… 경추5번 정도까지라도 들어낼 수 있는 (물론, 목은 가능한 힘주지 말고 조심해야 한다) 머리 한켠 기댈 수 있을 만큼 만만하지만 너무 작으면 아프니깐 널찍하고 거대한 디딤 바위가 되어야겠다. 그리고 누가 고개를 쳐박고 짓눌려 있는지, 누가 땅 끝에서 소리도 못내고 질식하고 있는지… 더 고개를 높이 들어 멀리 멀리 봐야겠다. (난 실제로도 낮으니깐…ㅎ) 그리고 같이 노래를 부르자!!! 화음은 하나님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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