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주님인가 선생인가

누가복음 19:28-48

(1) 예루살렘 입성, 새끼 나귀를 요청하시는 예수님
(2) 바리새파 사람의 반응과 타락한 도성에 애통하신 예수님
(3) 성전을 정화하시고 날마다 가르치시는 예수님


퀴리오스 예수

예수님은 열 므나의 비유를 마치시고 앞장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입성을 위한 새끼 나귀를 구해오라고 하시면서 스스로 ‘주님’이라 일컬으신다. (31절)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이 알려주신 그대로, “주님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십니다.”(34절)라고 말하며 새끼 나귀를 그 주인에게서 데려온다.

여기 ‘주님’, ‘퀴리오스’ 라는 단어는 신약에 수없이 등장하며(총 658회) 누가복음에서만 무려 93번 사용했다. (‘주 예수’라고 할 때도 동일한 단어) 퀴리오스는 최고 권위의 통치자, 하나님, 주를 뜻한다. (픽트리성경 참조) 우리의 최고 통치자가 필요로 하신다라는 말에 영문도 모르던 나귀 주인들도 말없이 새끼 나귀를 내어주고 있다. 그리고 새끼 나귀를 타고 엉거주춤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제자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님’ (38절)을 찬양했다. 제자 무리에게 예수는 최고의 권위자였다.

디다스칼로스 예수

반면, 그 속에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에게 예수는 여전히 ‘선생님’, ‘디다스칼로스’ 였다. 특출나게 지혜롭고 특별한 능력이 있는 귀인인 것은 알겠으나, 여전히 자신들과 같은 ‘선생’이지, 더 높은 차원의 존재, 주님이실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 예수는 모든 주권을 관장하는 주님이시지만, 그것을 인정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예수는 훌륭한 선생님이다.

예수를 주로 부를 수 있는 사람들

예수님의 등장은 어딘가 초라하고, 해학적이기까지 한데, 그런 모습에도 제자 무리의 진심어린 감격과 기쁨이 느껴진다. 이 때 누가는 제자들이 “자기들이 본 모든 기적을 두고” 기뻐하며 찬양을 했다고 기록한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들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분이 진정한 우리의 새로운 왕이시다!”라며 환호의 세레머니를 할 수 있었다. (비록 그들이 상상한 것은 통쾌한 쿠데타였을지언정)

몇일 전 예전 교회에서 같이 훈련받았던 친구와 통화를 했다. 자신이 정말로 복음을 믿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매일 마주하는 세상사에 낙담되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이 버겁고 지치고… 무엇보다 말씀대로 사는 삶이 두렵게 느껴진고 말했다. 그러면 망할 것 같다고.

친구의 솔직한 마음에 무척 공감이 갔다. 비록 지금은 하나님을 따르다 망할것 같다는 두려움은 없지만, 나도 여전히 매일 벌어지는 아주 자잘한 일에도 두려움이 엄습한다. 아, 어쩌지 싶은 일이 너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처럼 생계나 관계에 관련된 일이다. 그럴 때면 가만히 나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복기해야 한다. 두려울 때마다 하자면 하루에 수만번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제자 무리처럼 기뻐하자…! 새끼 나귀 위에 걸쳐진 옷들 위에 앉아 있던 왕의 모습처럼 나의 현재도 어딘가 부족해 보일지언정, 그가 하신 일들로 기뻐하고, 나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신 임금님이 완전히 이루실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자! 나의 퀴리오스를 그저 이 땅에서 잘 살아내는 지혜를 주는 명강사 정도로 치부하는 과를 범하지 않길 바란다.

농도 짙은 사역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으셨다. 예배 공간으로서의 정체성을 상실한 성전의 기능을 복구하시는 일로 마지막 사역을 시작하신다. 그리고 ‘날마다’ 가르치셨다. 만약 나에게 몇일 뒤 죽음이 예정되어 있다면, 너무 아쉬워서 더 친밀한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나눌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많은 가르침을 전하려고 하셨다.

그의 마음을 도성의 모습을 보시자마자 크게 애통해하셨다(41절)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입성 직전에 전하신 ‘열 므나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왕이 되어 돌아오시는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의 현재의 삶도 비루해질 뿐더러, 그 나라가 도래했을 때 모든 것을 잃게 될 그 상황을 말씀하셨는데, 그것을 염두하시며 탄식하셨던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너를 찾아오신 때를, 네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44절) 그런 절절한 마음이셨기 때문에, 마지막 사역에서는 정말 시간과 힘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이 강하게 느껴진다. 어떤 사건이나 기적보다는 대부분 가르치는 일로 사역을 쫀쫀하게 채우셨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나의 죽음도 가까워진다

매일 죽음과 가까워지고 있지만, 일상사에 함몰되면 자꾸만 살고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조급해지며 부산스럽게 복음을 전하거나, 의식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착각하는 것들)에 바쁘지 않길 바란다. 그보다는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늘 바라고 읽을 수 있길 바란다.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합해지는 마음이 앞서기 시작하면, 일은 되어가는 것 같다. 내가 움직이고 있으면서도, 일하고 있는지를 감각하고 있지 못할 정도로. 그것은 우리가 사역을 ‘하는'(do)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일이 ‘되어지도록'(done) 우리를 사용하시기 때문인 것 같다. 이번에 풍삶기를 하면서 수빈 언니와 나눔을 하다보면, 우리는 각자의 삶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서로 발견하고 있다. 아, 이게 통로가 되고 쓰임을 받는다는 거구나 싶다. 놀랍다. 그래서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 라고 하셨나.(마태복음 11:30)

엑기스 같은 마음

그렇다면, 내가 집중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 마음 속에 농도 짙게 쫀쫀히 채워나가는 것이겠다. 그것은 곧 성령님의 욕망으로 나의 욕망을 뒤덮는 일이겠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라고 하시는 거구나…!! 라는 감탄이 공허한 메아리가 되지 않길 ㅎㅎ 아주 걸죽하고 뭉근하게 졸여진 하나님 마음의 엑기스가 되길. 왼손은 거들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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