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성실한 체질

누가복음 22:1-13
(1) 반예수파와 가룟 유다의 거래
(2)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 유월절을 준비하시는 예수님


악마가 생각하는 좋은 거래처의 조건

사악한 일을 도모하는 상황을 일컬어 ‘악마와 손을 잡았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누가복음 22장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가룟 유다와 악마의 거래는 단순히 자신의 이익을 넘어서서 순수한 악과 맞닿아 있을 때 성사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탄은 자신의 목적과 인간의 자기중심적인 욕망이 부합할 때 제휴를 제안하고 있다.

거래를 제안하는 악마의 입장에서도 늘 가장 신뢰할 만한 파트너를 찾고 싶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제사장과 율법학자는 그렇게 훌륭한 거래처는 아니다. 그들은 기본적인 수준의 죄, 즉 자기중심성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기중심성은 하나님이 아닌 스스로를 자신의 주인으로 생각하는 죄의 근원이다. 구세주인 예수를 인정하지도 않는 사람들의 자기중심성은 이미 창세기에서 시작된 죄의 역사에서 너무 자연스러운 성질의 것이라 사실상 사탄의 개입이 필요하지도 않는 수준이다. 굳이 개입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 굴러가는 시장이다. 그런 곳에 리소스를 투입할 악마가 아니다. 인간보다 신성에 가까운 위치에 있었던 존재인 사탄의 수행능력은 훨씬 탁월할 수밖에 없다.

당시 종교적-정치적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권한을 침범하지 않는 한, 예수가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실제로 두려워한 대상은 예수가 아니라, 사람들(백성)이었기 때문이다.(3절) 그러나 군중의 마음을 선동하고 있는 예수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것을 보며 상황이 달라졌다. 예수의 활동을 내버려두면, 굳건해 보였던 자신들의 권력이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렇기에 예루살렘 입성 후 성전에서 가르치시는 예수께 그들이 처음 한 말은 고작 “당신은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합니까?” 였다.(눅20:2) 니가 뭔데?!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어…제발 가버려..! 딱 이 정도 수준. 사탄은 생각했다. ‘쯧, 찌질한 것들…. 그래도 저런 거라도 어차피 있으니깐 잘 이용해보자.’

한편, 가룟 유다는 어떠한가. 그는 예수님을 자신의 선생으로 받아들려 따르던 제자였다. 유다의 욕망은 대제사장이나 율법학자들보다 더 복잡하고 고차원적이다. 단순히 자신의 이익이나 권한만이 중요했다면 예수를 따르지도 않았다. 먼저 유다는 기득권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렇기 때문에 자연스레 현재 세계에 불만이 있었을 것이다. 잘못된 세상을 바로 잡으러 왔다는 예수라는 혁명가의 무리를 따라 통쾌한 쿠데타를 상상하며, 정의의 사도이자 최종 승리자가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유다가 그런 야망가였다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과정과 사역들을 보며 극심한 현타가 오지 않았을까. ‘아니 이게 뭐야, 뭔가 좀 이상하다? 내가 생각한 그림이 아닌데? 예수는 내가 생각했던 지도자가 아닌것인가?’

악마의 잭팟이 터진다! 당첨! 최고 수준은 아니지만, 아주 적합한 조건을 가진 거래처가 등장했다! 먼저는 예수에게 심리적, 물리적 타격이 가장 클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라면 좋겠다. 두번째로는 자기중심성을 넘어서 그것을 사회적 당위성으로, 그리고 예수를 향한 의구심… 적대심으로까지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쓸데없이 머리를 많이 굴리는 사람. 내 사랑스런 가룟 유다야.

악의 작품 : 죄

사탄, 악마는 천사가 타락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순수 ‘선’인 하나님에 속해있는 천사의 타락은, 반대 속성인 ‘악’을 의미한다. 히브리어로 ‘대항자, 고발하는 자’라는 의미처럼, 본질적으로 신성인 하나님에게 대척한다. 사탄의 본능적인 관심과 집착의 대상은 인간의 죄처럼 자기자신이 아닌, ‘하나님’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하나님의 실패. 사탄은 하나님의 선이 실패하길 원한다. 그래서 부지런히 유혹하고 시험한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드라마 ⟪비밀의 숲⟫ 시즌1의 유명한 대사를 빌리자면, “악은 성실하다.” 누구보다 더.

창세기에는 그런 사탄의 첫번째 유혹이 등장한다. 뱀으로 나타나 인간의 원죄를 탄생시켰다. ‘죄’는 사탄의 첫번째 작품이자, 그런 수준의 영향력 있는 작품성은 다시 볼 수 없을 정도로 창세 이후 최고의 수작秀作이다. (진심 천재다 천재…) 죄는 인간의 최고 관심을 자기 스스로에게 향하게 함으로써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하고 인격적인 관계—인간이 가장 온전할 수 있는 상태—를 끊어냈다. 더불어 그것은 하나님을 슬프게 했다. 하나님을 향한 사탄의 이런 집착은 한편으로 애달파 보이기까지 한다. 아버지를 미워하는 애정결핍의 아이처럼.

사정이 이러하니 죄성을 가진 인간의 몸으로 오신 예수를 발견했을 때, 사탄은 얼마나 흥분했을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시험에 굴복시킨다는 것은 사탄에게는 첫작품을 뛰어넘는 일생일대 최대 규모의 프로젝트이자, 유작이 되어도 좋을만한 성과일 것이다. 게다가 유혹에 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으로 온 신의 아들이라니!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악마의 세가지 유혹은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을 끊어내는 유인책이다. 그러나 단순히 아들이 아닌, 하나님과 동격이었던 예수님은 그 시험을 완벽하게 통과하신다.

구제 가능한 유혹 vs. 구제 불가능한 거래

누가복음 22장에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유혹하는 사탄의 또다른 기획이 등장한다. (이 얼마나 성실한가! 거래 하나 끝나자마자 신규 거래 트는 중… 찐영업왕) “시몬아, 시몬아, 보아라. 사탄이 밀처럼 너희를 체질하려고 너희를 손아귀에 넣기를 요구하였다.” (눅 22:31) ‘체질’은 알곡과 가라지를 걸려내는 하나님의 최후 심판을 비유하는 표현으로 익숙한데, 구원 심판과 거의 동일한 잣대로 사탄도 우리를 늘 체질하고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내버려두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지만, 살짝 엇나가게 하면 사망시킬 수 있는 연약한 영혼이 없을지 늘상 그리스도인들을 톺아보고 있는 사탄. 최후 심판에 도달하기 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는 늘 악의 심판대 위에 놓여있는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이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러나 나는 네 믿음이 꺽이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네가 다시 돌아올 때에는, 네 형제를 굳세게 하여라”(눅 22:32) 사탄의 기획하는 거래가 성사될 정도로 제자들의 믿음이 유다처럼 예수님을 적대하는 수준으로까지 무너지기 전에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그리고 비록 예수님을 모른척하며 도망가게 되더라도, 그리스도이신 예수를 부인하는 수준으로 무너지지 않는다면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 실패를 딛고 일어나면 단단해져 다른 이들도 굳세게 할 것이라는 사명으로 이어지도록 당부하신다.

이쯤 되니,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 ‘주기도문’에 나오는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의 무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알게 된다. (눅 11:4) 사탄은 함부로 유혹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나면, 이 시험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온다. 시험에 든다는 것은 이미 악의 유혹에 빠질 수 있을 충분히 좋은 조건이 갖추어져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정하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에 놓여있는 신실한 종(욥 처럼)인데, 그 신실함이 의구심으로 바뀔 수 있는 기회가 보이는 사람(가룟 유다)인 것이다. 간절히 그 시험 자체에 들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이 사탄의 작업 방식에서 알수 있듯이 제자도의 길에서 시험을 피할 수 없다면, 예수님이 알려주셨듯 먼저 나도 기도해야 겠다. 이것은 시험을 인간 스스로는 빠져나올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탄의 체질에서 무사히 걸러질 수 있도록 해주시고, 걸려 들더라도 끝까지 빠져 나와 주께 돌아갈 수 있도록 해주시라 기도해야 겠다. 사탄과의 거래 단계까지 가면, 유다처럼 돌아올 수 없는 종말의 길을 가야 한다. 그때는 구제 불가능하다. 가룟 유다는 최후 심판이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저지른 일을 직시하고, 차마 돌아갈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절망하며 자살한다.

의심하는 제자가 되려거든, 솔직한 죄인이 되자

지식이 많아지면 그와 비례하게 얼마나 많이 무지한지 깨닫게 되기 때문에 겸손해지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의심이 많아진다. 진리를 바탕으로 늘 무엇이 진실인지 분별할 수 있는 건강한 의심을 하며 살아야겠지만, 통찰없는 지식만 많아지면 의심하면 안되는 것까지 의심하게 되는 실수를 하게 된다. 신성의 영역은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깊이 사귀며 그의 평온을 누리고 사랑을 나누는 경험적 영역이지, 정체가 무엇인지 분석해 내야 할 과학적 탐구 영역이 아니다. (다른 차원에 속해있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탐구가 불가능한 영역이기도 하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과 친밀해 질수록 한걸음 떨어져 분석적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 보라며 그럴싸하고 세련된 시각을 제안할 것이다. “정말로 그런 것 같아?” 라며 은근슬쩍 찔러볼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제자이기 이전에 죄인이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해야겠다. 제자가 되어 의심하려거든, 평생 죄인으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길 바란다.

“아, 딴건 모르겠고, 일단 내가 죄인인건 확실해. 그러니깐 꺼져 이 XXX야!”
실제 상황에선 험한 말보다는 암송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지성인답게? ㅎㅎ
그리고 성실히 체질sieving하는 사탄보다 조금 더 성실한 기도의 체질體質이 되는 욕심같은 바램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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