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히브리 산파의 시민성

출애굽기 1:1-22

(1) 이집트 체류 400년, 번성하는 이스라엘 자손과 위협을 느끼는 이집트왕
(2) 산아제한과 노역으로 핍박받는 이스라엘 자손
(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히브리 산파들의 저항과 하나님의 은혜


투표: 무엇을 위한 시민의 권리행사인가?

오늘 서울과 부산에서는 시장의 공석을 채우는 선거가 있다. 부산을 고향으로 둔 서울 시민으로서 보궐선거를 하게 된 경위도 착잡할 뿐더러, 지난주부터 공약과 후보 토론을 보는 마음은 어느 때보다 절망적이다. 진영이라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기득권 밖에 없다. 이쯤되니, 지도자가 없는 편이 실무를 쭉 해오고 있던 공무원들이 알아서 더 시정을 잘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얼마전 부산에 사는 엄마께서 통화 중에 “그래도 2번 뽑아야 한다!”라고 하시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멍멍이 흥분을 했다. 2번 후보가 시장직을 맡던 시절이 내가 갓 사회로 나온 시기였는데, 당시 디자인 공무원이니 사회적 기업이니 엄청나게 광고하던 갖가지 미봉책이나 구체적인 전략이 없는 약속들만 믿고 진로를 결정했다가 오랫동안 자리를 잡지 못한 (나를 비롯한) 동기들이 꽤 있었다. 전시행정을 위한 기약 없는 홍보에 어리숙하게 말려든 것 같아서 화도 났지만, 역시 가장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이들의 무상급식 건으로 급작스런 사퇴를 한 것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살면서 그렇게 무책임하고 허무한 그림은 처음 본 것 같았다. 이런 개인적인 한(?)이 있기 때문에 주관적으로 좋게 보이지 않는 후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밖에도 그가 살기 좋다고 생각하는 도시의 청사진이 도무지 공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엄마께 괜한 화를 내었고, 그 이후로는 아무말 하지 않으셨다.

나는 사실 한국 정치계의 역사나 전반에 대해 지식이 매우 짧은 편이다. 선거철 및 중요한 제도나 사건들이 거론될 때에나 관련 정보들을 뉴스를 통해 살펴보는 정도였다. 그리고 각 안건에 대한 판단 기준은 자연스럽게 ‘나’였다. ‘나에게 얼마나 손해일까 이익일까? 우리 부모님이나 가족들에게는 안전한 방향인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그림과 같은가?’ 조금 더 간다면 ‘향후 세대와 환경에는 괜찮은가?’ 정도였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를 알고 나서는 그 기준이 훨씬 더 사회적 약자들을 기준으로 전환되어야 하고, 세계적 관점, 생태계 전반으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래도 여전히 세계에 대한 지식은 부족해서 시민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투표권을 어떻게 써야할지 공약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늘 한계가 있다.

장기 체류자 이스라엘 민족 : 이집트의 외국인 노동자

한 집단이 타국으로 옮겨가 400년 정도 살면 사실상 그 나라의 시민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이 그러하길 바라지 않으셨을 뿐더러, 이집트 사람들도 그들과 한 가족이 되길 바라지 않았던 것 같다. 요셉의 시절에 이주를 해 올 때부터 이집트 사람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천하게 여기던 직업인 양을 치는 유목민이었다. 이집트인들의 기피 덕분에 이스라엘 종족은 고센 지역에 분리 정착해 문화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후 400년 동안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스라엘 민족의 수가 급증하자(8절), 그 머릿수 자체로 그것은 하나의 정치적인 ‘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이집트의 왕은 두려워졌다. 만약 이스라엘 민족도 자신의 백성이라고 여겼다면, 그들의 번영이 반가운 일이었을 터이지만, 이집트왕에게 그들은 필요악처럼 존재하는 ‘외국인 노동자’였다. 이집트 생계를 위해 필요하지만 위협이 될 정도의 힘을 갖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산아제한을 하고 노동력을 착취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이집트의 관점과 처사는 마치 20세기 후반 독일 및 유럽 패권국가, 그리고 미국 사회를 보는 듯하다. 전후 도시 발전에 박차를 가하던 서구 열강은 더 이상 제국주의식의 공짜 노동력을 착취할 수 없게 되자, 적극적으로 이민 노동자를 모집했다. 당시 우리 나라에서도 독일로 많은 수의 광부와 간호사들이 자원하여 갔었고, 그 수에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중동 이민자들이 옮겨갔다. 그래서 현재 독일에는 특히 터키인들을 중심으로한 이슬람교인들이 많다. 그러나 어느정도 사회가 안정을 찾고 보니, 엄청난 출산율을 자랑하는 문화권의 외국인들의 수가 과도하게 많아지기 시작했다. 이제 국민의 주류 정체성이 재정립되어야만 할 것 같을 정도로. 사실상 원주민을 내쫓고 백인들을 중심으로 세운 미국이나 호주만 보아도 쪽수의 힘이라는 것이 그만큼 무서운 것이 아닌가? 아주 오랜 옛날부터 여전히, 인류의 역사는 늘 땅 따먹기의 역사였다. 지금은 그 땅이 다른 차원으로까지 확장되었을 뿐, 우리는 여전히 안밖으로 영역과 권리 투쟁을 한다.

출애굽기 이집트의 고민처럼, 현대의 패권 국가들도 이민자들을 동일한 국민으로 생각하기에는 인종과 문화의 차이에 대한 기본적인 거부감—낯선 것은 불편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이 있다. 또, 노동자의 자격으로 온 사람들의 교육 정도는 낮을 수 밖에 없기 때문에 그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은 범죄율이 높다. (내가 잠시 지냈던 스튜트가르트에도 터키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 있었는데, 그곳은 우범지대라 밤길이 위험한 곳이라며 친구들이 신신당부했던 기억이 난다. 실제로 창문에서 뭔가가 많이 떨어졌다… -_-) 그럼에도 세월이 지나면, 이민자들의 교육 정도도 높아지게 되고 화이트칼라로의 진출율도 높아지면서 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문제는 기존 국민들의 입장에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 결정적인 위협을 느끼는 게 된다. 예전에는 어차피 나와 영역이 겹치지 않았는데, 이제는 내 밥그릇이 위협이 된다. 이런 기로에 섰을 때, 여러 국가들은 이민정책을 뒤집을 생각을 하고, 거주민들 사이의 혐오가 발생하기 시작한다. 그것이 오늘날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역차별과 혐오 현상과 동일한 기제로 보인다. 최근 어느 흑인이 동양인 할머니(미국 시민)를 폭행하며 말했다고 한다. “Go back to Korea!”

우리 도시의 장기 체류자는 누구인가

체기까지 느껴질 정도로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근대화를 이룬 대한민국. 그와 동시에 한국의 젊은 인구는 줄어들고, 어느새 외국인 학생을 수입해 와야 할 정도로 지역대학의 비어가는 재정을 외국인 학생들이 채워주고 있다는 뉴스를 자주 접한다. 학생 이전에 우리의 농어촌의 어르신들은 20여년 전부터 외국인 며느리를 수입해와야 했었다. 한국 국적의 여성이 기피하는 자리를 위해, 내 아들과 집안을 위해 헌신할 여성 노동력 말이다. 그 이후에는 크고 작은 산업에서 더 많은 이익을 남기려면 재료비와 함께 노동력을 저렴하게 수급해야 했는데, 그 때문에 수많은 외국인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외국인들의 인권문제와 처우를 돕는 움직임들도 있지만, 이집트와 서구열강과 동일하게, 우리 사회도 국민들이 자신의 생명이 위험하다고 상황에서는 외국인들의 권리는 고려할 상황이 아닐 뿐더러 그들이 되려 자신들을 잡아먹을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전세계적인 경제적 위축(사실은 상대적 박탈감) 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 중인 혐오라는 사회적 병리 속에서 문화인류학자 조한혜정 선생님이 역설하신 ‘난민 정신’이 생각난다. 결국은 이 모든 것이 세계화가 되어가는 상황에서는 상대적인 권한의 문제이자, 다양한 문화가 충돌하는 가운데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현상인데, 그렇다면 서로가 서로에게 난민이 될 수 있는 상대적 관계 역학이 늘 존재한다. 또한 실제로 한국 역시 난민이었던 시기가 있다. 그럴 때 누군가의 포용과 도움이 지금의 우리가 되도록 한 것이라는 사실을, 희생적인 나눔이 전제되지 않으면 폭력으로 되풀이 될 뿐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애굽 이후에도 그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아서 예수님이 오셨던 것이지만, 이 사회는 동일하게 이집트라 하더라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 난민의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관점으로 시장 후보를 바라보고 있는가?

나는 어느 도시의 시민인가? : 히브리 산파의 시민성

누군가 다른 지역이나 해외에 더 오래 거주할 지라도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서울이면 서울시민이다. 그래서 서울시는 나에게 시장 투표권을 주었다. 그런데 나는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속한 시민이다. 내 행정 주소지나 여권이 바뀌어도 이 소속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이것은 모두 동일하다. 어느 영토의 소속이기 이전에,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는 땅의 나라를 떠나갈 때 우리의 궁극적인 소속 국가이기도 하다. 이 곳에서 우리는 늘 거류민이다.

출애굽기 1장에는 이 원리를 명확히 적용한 사람들이 나온다. 바로 히브리 산파들이다. 이집트에서 태어나 자란 외국인 이민자 4-5세 정도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또한 이집트에서 활동하는 전문직 여성들이기도 하다. 차이나타운에 살아도 서울시 제도를 따르는 서울 시민인 것처럼, 이들도 행정적으로 이집트 시민이다. (서울시도 3년이상 거주한 외국인들에게는 시장 투표권을 주고 있다.) 그런 이집트의 최고 권력가가 그들의 전문성을 빌어 산아제한을 했지만 히브리 산파들은 왕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아이들을 보호하는 목숨을 건 도박을 한다. 산파들은 자신들이 정치적 판단의 최우선 순위에 하나님을 두고 있다. 국가가 명령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성실히 학살했던 아이만의 순수한 복종처럼, 산파들이 자신들이 사는 땅의 왕에게 성실히 복종했다면 어떠했을까. 동족간의 엄청난 영아 학살이 일어났을 것이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동일하게 미워한다면, 하나님을 배신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면, 하나님이 아끼시는 것을 동일하게 사랑한다면… 강력하고 풍요로운 이집트에서는 쫓겨나도,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절대 쫓겨날 수 없다는 생각을 기반으로 차근차근 정치적 판단을 해야겠다. 필요하다면 산파들처럼 모험을 해야 할 수 있다. 지적, 영적 한계 때문에 나의 정치적 판단은 늘 완벽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왕의 악한 마음도 사용하셨던 하나님이 지금의 세상 권력도 사용하고 계시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결국은 자신의 일을 하실 것이기 때문에… 부족하고 엇나간 방향일지라도 그 속에서 하나님이 하고 계신 일을 알아볼 수 있길 바란다.

(근데 아무리 그래도 개인적인 욕망으로 2번은 안되었으면 좋겠어요…. 싫어싫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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