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習)’하는 삶

이 글은 박연습, 황집중, 정수련이 운영하는 매거진 단련일기에 초청받아 작성하게 된 글이다. 단련’일기’를 요청하셨지만, 어쩐지 남의 일기장에 일기를 쓰는 이상한 느낌이라, 나는 그들에게 편지를 쓰기로 했다.

‘습(習)’의 삶

제가 경험해온 삶의 모든 측면은 ‘학습’이라는 한 단어로 응축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제게 ‘학습’은 12년 의무교육을 받는 동안 혐오하게 된 단어였습니다. 그러나 스무 살 대학 첫 학기 전공 수업에서 그 의미가 갱신된 이후, 매우 좋아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배우고(學) 익히다(習).’ 즉, 지식을 아는 것(어떤 것의 원리를 이성적으로 깨닫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 깨달음을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반복하는 ‘습’을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온전한 지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시 교수님께서 강조하신 부분은 바로 그 ‘습’ 이었습니다. 세상에는 많은 정보와 지식이 있지만, 정작 그것을 스스로 ‘습’하는 사람들이 무척 적다고 하셨어요. 실제로는 그 ‘습’에서 진정한 배움이 완성되기 때문에 단순히 다양한 지식을 새로이 접하는 시간보다 시행착오하는 지긋지긋한 시간을 견뎌내야 한다고 하셨어요.

그때 그 가르침은 제가 대학과 대학원, 어떤 고급 교육 과정을 통틀어 접한 모든 지식보다 삶을 살아가는데 더 쓸모가 있었습니다. 실제로 지나온 생의 경험에 비추어 봐도 그 개념이 너무나 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가능한 모든 것을 ‘습’의 자세로 나아가려고 애썼던 것 같아요. 특히, 당시는 부모님 보살핌에서 떨어져 나와서 자신을 돌보는 삶을 시작한 시기였기에 더 와닿았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귀찮고 힘든 일도 억지로라도 ‘습’ – 반복하게 되면, 조금 더 수월해지고 싫었던 일조차 어느 수준에 이르러서는 전혀 거리낌이 없거나 심지어 좋아지는 일도 생겼습니다. 그 대표적인 영역 중 하나가 몸의 ‘움직임’이었습니다.

생존의 습(習): 걷기와 요가

아주 어릴 적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예술고등학교 생활을 거쳐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주로 받은 훈련은 ‘오래 앉아있기’입니다. (현재의 교육 현장은 어떤지 몰라도, 90년대에는 “엉덩이가 무거워야 좋은 대학을 간다.”라는 말도 안 되는 정언명령이 존재했답니다) 한창 신체가 성장할 시기에도 운동과 거리가 멀어서, 체력장에서는 늘 최하위 등급이었고, 체육 시간은 늘 고문이었습니다. 예민하고 긴장을 잘하는 성격에 떨어져 가는 자존감만큼 자세도 움츠러들기 시작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 지내다 보니, 20대 초에 이미 몸이 굳을 대로 굳어 있었어요. 21살의 어느 날 아침, 몸이 움직이질 않더군요. 그때부터 살기 위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생활 방식을 익혀야 한다는 것을 온몸으로 깨달았습니다. 

제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움직임은 ‘걷기’였습니다. 그래서 자취 집에서 학교까지 1시간 남짓 걸어 통학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주거지 근처를 산책하는 습관을 만들어가기 시작했어요. 그 습관은 지금까지 잘 이어져서 여행을 가서도 가능한 아침 산책은 하는 편입니다. 단순히 걷는 것 이상으로 무언가 일단 정식으로 배우며(학) 지속(습)할 움직임이 필요하다 여기던 차에 요가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어찌나 몸이 엉망이었던지 어떤 자세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가만히 서 있는 산 자세(타다아사나) 조차 힘들었습니다. 호흡(프라야나마)도 알지 못하던 때이니 당연했겠죠. 첫해는 수련 때마다 속으로 욕설을 수없이 내뱉었습니다. 숨쉬기에서부터 찬찬히 요가의 맛을 알아가고, 1년, 2년… 제 몸이 달라져 가는 것을 체험하며 요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매일의 ‘습’을 통해 동작에 대한 감각이 익숙해지니 그와 연관해서 더 깊이 있는 또 다른 ‘학’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작업 중인 만화 <우리집 지희씨> 12화: 새벽산책 중 

움직임의 학(學): 스쿨오브무브먼트

2012년에 최하란, 정건 대표님이 운영하시는 스쿨오브무브먼트(움직임의 학교, 이하 SOM)를 만나, 바르게 서기, 걷기, 달리기, 기어가기 등 인간 신체가 지향하는 원형적이고 필수적인 움직임을 배웠습니다. 충격적이었어요. 지금까지 제가 서고 걷고, 뛰고, 앉고 일어나는 방식은 몸을 상하게 하고 있었어요. 인간의 몸은 어떤 상태로 잘 고정되어 있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움직이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개념 덕분에 요가 수련도 새롭게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더는 고정된 자세에 도달하는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어요. 혹, 저처럼 육체적인 요가를 어느 정도 수련하다 어딘가 더 악화하는 경험을 한 사람이 있다면 몸의 기능적 움직임(functional movement system, FMS)을 공부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궁극적으로 명상적 단계를 추구하는 요가 수련을 지속하다 보면 움직임보다는 어떠한 자세(아사나)를 ‘고정하는 것’을 더 의식하는 경향이 많아지기 때문이죠. 그렇기에 요가에서도 억지스럽게 고정하라고 표현하지 않고 ‘머무르라’고 표현합니다. 마치 편안히 정지한 것처럼 보이지만, 엄청난 내부적 떨림을 호흡으로 녹여내는 거대한 역동성이 존재해요.

SOM에서 기초적인 움직임 외에도 아주 다양한 것들을 배우고 오랜 시간 함께 익혔어요. 케틀벨, 인디언 클럽과 같은 도구(tool)를 사용하는 맨발 수업을 통해 코어를 강화하는 법을 배우고, 제가 너무나 싫어했던 달리기가 바른 원리를 알고 나면 얼마나 즐겁고 편안한 움직임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줄넘기는 여전히 어려워요….) 인(yin, 음)요가를 만난 것도 인생의 큰 선물이었습니다. 인대, 관절, 뼈, 파시아와 같은 결합조직(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에서 다룰 수 없는)을 강화하는 인요가를 통해 적극적 이완을 배우고 연습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셀프디펜스 중심의 크라브 마가 수업을 통해 다른 사람의 움직임과 호응하는 움직임의 새로운 재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탱고가 오랜 로망이자, 몸치라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크라브 마가 덕에 용기가 생겼어요 ^^)

생의 한계: 지속가능한 움직임

그렇게 ‘습’이 새로운 ‘학’을, ‘학’이 새로운 ‘습’으로 나아가게 하는 나선형 사이클을 14년 정도 해왔습니다. 요가의 경우는 너무나 심취해 버려서 한때 요가 지도자의 꿈을 꾸며 자격 과정을 수료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생활 요기로 돌아왔습니다. 움직임은 유익이 크고 하다 보니 더 좋아져서 지속하게 된 동기도 크지만, 실상은 생존을 위해 매일 몸을 구석구석 윤활유로 기름칠하는 목적이 가장 큽니다. 하루 이틀 움직임을 미루고 게을러지면 그 이후가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빚을 노후에 한 번에 짊어지지 않으려면 젊어서부터 조금씩 앞당겨 소진해버려야 한다는, 이를테면 고통의 할부금이랄까요… 신체에 대한 확고한 세계관이 20대 초의 경험으로 잡혀버렸습니다.

생태계의 모든 활동이 그러하듯, 학습에도 한계가 존재합니다. 움직임은 ‘노화’라는 절대조건에 아주 큰 영향을 받습니다. 무조건 오랜 세월 연마한다고 기술적 역량이 끝없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운동을 많이 한다고 최상의 퍼포먼스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잘못된 움직임을 반복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우리 몸은 진실로 살아있는 유기체이죠. (전문 운동선수들의 활동 수명이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한해 한해 노화가 진행될수록 깨닫는 것은, 움직임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의 속도와 라이프스타일에 맞추어 조율해나가는 그 자체가 바로 수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움직임은 지금 나의 신체 상태, 생활방식(아침형/야행성), 경제 상황에 무리 되지는 않지만 때로는 조금 더 도전해볼 수 있는지 가늠하는 일,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상태로 끊임없이 균형 잡아 가는 요가적인 삶의 운영 방식, 나의 생(生)과 대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지구 전체에 대해 인간의 문명도 그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생명의 한계: 지속가능한 움직임

그렇게 ‘습’이 새로운 ‘학’을, ‘학’이 새로운 ‘습’으로 나아가게 하는 나선형 사이클을 14년 정도 해왔습니다. 요가의 경우는 너무나 심취해 버려서 한때 요가 지도자를 꿈꾸며 자격 과정을 수료했지만, 지금은 여러 가지 이유로 생활 요기(yogi)로 돌아왔습니다. 움직임은 반복하다 보니 더 좋아져서 지속하게 된 동기도 크지만, 실상은 생존을 위해 매일 몸을 구석구석 윤활유로 기름칠하는 목적이 가장 큽니다. 하루 이틀 움직임을 미루고 게을러지면 그 이후가 너무나 고통스럽다는 것을 경험으로 알기 때문입니다. 고통의 빚을 노후에 한 번에 짊어지지 않으려면 젊어서부터 조금씩 앞당겨 소진해버려야 한다는, 이를테면 고통의 할부금이랄까요… 신체에 대한 확고한 세계관이 20대 초의 경험으로 잡혀버렸습니다.

생태계 자체가 그러하듯, 모든 학습에는 한계가 존재합니다. 움직임도 ‘노화’라는 절대조건에 아주 큰 영향을 받습니다. 무조건 오랜 세월 연마한다고 기술적 역량이 끝없이 높아지지 않습니다. 운동을 많이 한다고 최상의 퍼포먼스가 유지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잘못된 움직임을 반복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 그래서 한 해 한 해 노화가 진행될수록 깨닫는 것은, 움직임은 결국 자기 자신의 생의 속도와 라이프스타일에 맞추어 조율해나가는 그 자체가 바로 수련이라는 사실입니다. 움직임은 지금 나의 신체 상태, 생활방식(아침형/야행성, 식생활), 경제 상황에 무리 되지는 않지만 때로는 조금 더 도전해 볼 수 있는 정도를 가늠하는 일, 안전하고 지속 가능한 상태로 끊임없이 균형을 잡는 자신만의 삶의 운영 방식, 결국 나의 생(生)과 대화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 지구 전체에 대해 인간의 문명도 그러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삶을 지속하게 하는습(習) : 공존, 함께하는삶

단련은 세 분 운영진처럼 저도 좋아하는 주제라, 함께 나누고 싶은 영역들이 많았는데 움직임에 대해 쓰다 보니 지나치게 길어져 급히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제가 가장 최근에 시작한 새로운 ‘습’에 대해서 소개하려 합니다. 

타자와 함께 나누고 더불어 사는 삶은 제가 가장 오랫동안 ‘학’에 머무르고, ‘습’하길 주저했던 영역입니다. 이성적으로 그것이 너무 합당하고, 그러지 않고서는 생을 지속하는 것이 더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받아들였지만, 진심으로 타자에게 기대고 의지하는 일은 너무나 어색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가정과 공교육을 통해 배우고 익혀온 삶의 방식은 남들보다 뛰어난 역량을 개발해서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스스로 ‘알아서 잘 사는 삶’, 성공적으로 독존하는 삶이었습니다. 좀 여유가 되어 누군가를 돕고 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이지만, 일단 자기 스스로부터 잘 구제하는 방식이 저에게 익숙한 가르침이었고, 라이프스타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계속 살아가다 보니 제 능력의 한계가 왔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대학을 가기 위한 기술적 지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인문과학 지식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알게 된 것은, 인간은 애초에 그런 방식으로 존속하는 것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사회 구성원 서로가 돌보며 살아가야 한다니. 완전한 체질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렇게 살아본 경험이 없어서 다짜고짜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했지만, 도전했다가도 어색하게 빠져나오기 일쑤였습니다. 그 작업을 도전하고 도망하길 반복하다, 재작년 개인적으로 큰 현실 자각 시간을 맞이하고는, 더는 스스로 도망갈 곳도 없는, 그러니깐 빼박의 상황으로 저를 몰아가기로 했습니다. (일종의 창조적 파괴라고 해야 할까요) 그리고 공존하는 삶을 함께하고 싶은 공동체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났습니다. 저는 여전히 누군가를 돌보고 이해하는 일이 어렵고, 여럿이 함께 하는 일이 어색하고 서툴러요.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 서툴겠죠) 다만, 예전에는 그런 것조차 스스로 방법을 찾아 ‘노오력’해야 했습니다. 지금은 그저 고군분투하는 것이 아니라, 나보다 한걸음 앞서가는 누군가의 발자국을 보며 따라가고 있습니다. 덕분에 정말 중요한 것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는 것 같아요. 그리고 신기하게 남을 돌보는 일이 나를 돕는 일이 된다는 섭리를 조금씩 경험적 감각으로 체득해가고 있습니다. 나의 실패를 거부하지 않는 안전한 관계 안에 있으니 더 용감해지기도 합니다. 제가 넘어지면 일으켜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매일 서로 기대고 잇대어 나아가는 와중에 시나브로 ‘습’을 하고 있더군요. 

고민의 양과 질 모두 바뀌었습니다. 과거에 노심초사 걱정하던 많은 영역들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요. 삶의 방향과 상이 단순해지고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유기적으로 하나로 자연스레 엮여갑니다. 마치 혼자 지내던 나무가 이제는 다른 나무들과 함께 엮여서 숲을 이루듯요. 태풍과 벼락은 여전히 오지만, 예전보다 덜 무서워요. 무엇보다 혼자서는 버거워서 할 수 없었던 좋은 일들도 예전보다 힘을 덜 들이고, 심지어 즐겁게 할 수가 있더군요. 나는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나 싶어요.

아마 [단련일기] 필진이나 구독자들께서는 이미 공존하는 삶을 잘하고 계셔서 이런 이야기가 생경하게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혹시 저처럼 이런 영역에서 어려움이 크신 분들께는 동기부여가 되길 바라요. 제가 지향하는 삶의 방식과 가치관이 모두에게 정답이고 최선일 수는 없겠지만, 일단 ‘학’하고 ‘습’해보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요. 지속할지에 대한 선택은 그 뒤로 미루고요.

글의 기회를 주신 [단련일기]에 고맙습니다.
단련하는 삶을 응원하며,
박하 드림. 

🌿  박하 brunch @a-papership instagram @a_papership삶이 있는 그림을 그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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